어제 오후, 급한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탔다.
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출입문 곁에 섰다.
눈을 감고 역 하나를 통과할 때다.
"신천역 얼마나 남았지?"
내 앞에서 제법 나이가 든 목소리가 났다.
그 물음에 다른목소리가 하나,둘,서이,너이...
하며 노선표의 역을
세어나갔다. 어딘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.
나는 슬며시 눈을 떳다. 전철에 오를 때
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던
사십대 후반의 두 남자였다.
모나지 않은 둥근 얼굴에 머리칼이
반백이다. 넉넉한 허리둘레 탓인지
인색한 데라곤 없어 보였다.
"동구는 지금 뭐한데?" "국민학교 졸업하고 여적 못 만났으니
모르지." 형제처럼 다정하게 묻고
대답하는 걸로 보아 초등학교
동창회에 가는 길인 듯했다.
신천역까지 가려면 갈아타야 하는 반월당역까지
여섯 역은 더 가야 하는데,
벌써 출입문 가에 선 걸
보면 마음이 설레는 게 틀림 없었다.
친구의 물음에 늘 대답을
하던 남자가 이번에는 안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냈다.
묻기만 하던 남자는 또 몇번이고 머리를 만졌다.
"넥타이 매는게 부끄러워서 말야."
넥타이를 다 맨 남자가 차창에 비친 모습을
보며 어색해 했다.
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. 초등학교 졸업한 지
30년은 넘었음 직한 오랜 격절감.
그 끝에 동창들을 만나러 간다는
건 부끄러울 수 있고, 설렐 수도 있을테다.
나도 얼마전 겪었기에 아는 사실이 아닌가.
"영순이 걔, 미장원 하잖아. 전번에 전화 왔는데
걘 온다더라.
그런데 윗동네 방앗간집 은정이,
걘 남편이 아파 못 오지 싶대."
대답만 하던 남자가 그간에 알고 있는 소식을 말했다.
"은정이, 걔 참 예뻤잖아."
묻기만 하던 남자가 말했다.
"예뻤지, 눈 크고 쌍거풀 지고...."
두 남자는 거기서 한동안 아무
말이 없었다.
30년 전의 그 예쁜 은정이라는 여자애를
떠올리는 것 같았다.
나는 볼일이 있어 내렸다.
내리고도 전철이 떠날 때까지
그 자리에 서 있었다. 설레며 가는 그들의 마음을
오래 느끼고 싶어서였다.
누구에게나 초등학교 동창들 중에는
예쁜 여자애가 있다.
지나간 유년의 친구 얼굴을 떠올리는 건 그래서
아름다운것 같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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